What's New of 2012-02-23

전문가답변 : 잉카문명,마야문명,아스텍문명에 대하여 , Viracocha

잉카와 마야의 문화

잉카와 마야의 문화와 이들 인디오들의 조상은, 지금으로부터 수만 년 전 빙하기에 캄차카 반도 근방에서 육지가 된 베링해협을 통해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디딘 몽골리안 인종들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이렇게 건너온 인디오들의 조상들은 각 지역에 흩어져 살기 시작하면서 차츰 타 대륙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스페인에 정복당한 1500년대까지도 이들은 석기를 주 도구로 사용하였으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다른 어떤 대륙의 청동기나 철기 시대를 능가하는 발전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의 아메리카 대륙 3대 고대문명은 커다란 지리적 테두리 안에 있는 만큼 각 문화들의 개별적 특성들을 모두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잉카의 역사 ▶ 잉카족은 케추아족이라고도 하는데, 그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전설을 종합해 보면, 13세기경 쿠스코 분지에 침입하여 선주민족을 정복하고 정착했으리라고 추정된다.1532년 그들을 정복한 에스파냐인들이 기록한 잉카의 전승에 의하면, 초대 망코 카파크 이후 13명의 황제가 나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제 7대 까지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제 8대 황제 비라코차 시대에 강적 창카족의 공격을 받고 그들을 격퇴하는데 성공한 그의 아들 티투 쿠시가 제 9대 황제 파차쿠티가 되어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고 주변의 민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제국 형성의 기초를 쌓았다. 파차쿠티 자신이 정복한 것은 티티카카호(湖) 연안의 르파카족, 쿠스코 동방의 쿤티수유 지방 등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그 아들 투파크 잉카 유팡키가 페루 북부를 침입, 치무 왕국을 정복했고, 또 파차쿠티 사망 후 에콰도르나 칠레, 아르헨티나의 북부도 정복했다.15세기말에 이 잉카(왕의 뜻)가 죽자, 와이나카파크가 잉카가 되어 에콰도르 지방의 개척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원래의 수도인 쿠스코에 거점을 둔 잉카 지배층과 에콰도르의 키토에 거점을 둔 잉카의 황제파 사이에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525년경 와이나 카파트가 죽은 후 쿠스코에는 와스카르, 키토에는 아타왈파가 일어나 이윽고31년 혹은 32년에 내전이 반발했다. 그러나 아타왈파군이 쿠스코측을 완전히 제압한 직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거느린 에스파냐군이 침입하여 32년 11월16일 아타왈파가 고원의 도시 카하마르카에서 체포당하자 사실상 잉카 제국은 붕괴했다. 그후 망코라고 하는 잉카가 반란을 일으켜 그 자녀들이 71년까지 쿠스코 북서쪽 산중에서 굳게 버티며 에스파냐에 치열한 항전을 계속했다.

잉카의 신화 ▶잉카의 신화에 의하면 비라코차(Viracocha)라는 이름의 창조주가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 천체 중에서도 태양(Inti)은 최고의 중요성을 지니며, 그 아들 망코 카파크가 티티카카호에 하강, 잉카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계통의 신화에 의하면 쿠스코 남동쪽의 파카라크탄포의 동굴에서 망코를 비롯한 잉카의 조상들이 나와 후에 쿠스코에 정주한 잉카의 친족집단을 형성했다고 한다. 태양 외에 우레(일리파), 달(마마키랴),별 등도 신성시되고, 또 대지의 신 파차마마와 물의신 마마코차의 숭앙도 민중사이에 퍼져있었다. 거룩한 영이 깃든 장소는 와카라고 불렸는데, 인공의 신전, 성소만이 아니라 바위, 산, 우물 등도 포함된다. 쿠스코에는 시를 중심으로 350개소의 와카가 있는데, 이것은 시 중심으로부터 방사선상으로 뻗어 있는 세케라는 상상상의 선 안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며, 세케의 수는 잉카 영토의 4구분에 대응해 정해져 있었다. 쿠스코의 최고의 신관은 빌락우무(Villacuamu)라 불렸는데, 잉카 황제와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어서 모든 신전과 와카를 지배, 관할했으며 사제(샤먼)의 임면권도 가지고 있었다. 쿠스코로부터 독립해 있던 해안지방의 파차카마의 신전은 그 신탁이 중요시되어 에콰도르에서도 순례자들이 찾았다고 한다. 쿠스코 및 각지의 신전에서는 역에 의거해서 제례가 행해졌다. 쿠스코의 잉카는 시의 동쪽과 서쪽의 언덕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일출 일몰의 각도를 관측하여 1년 12개월의 주기를 지켰다. 6월의 동지일에 행해진 태양제(인티라이미), 9월에 행해진 달의 축제(코야라이미), 12월에 행해진 대제(카파크라이미)등이 특히 중요시되었는데, 제사 때마다 많은 라마, 마르모트(기니피그)를 희생으로 바치고 대량의 옥수수와 치차 주를 바쳤다. 또, 잡은 라마의 폐의 상태를 보고 점을 치는 카르파라는 신탁도 제사 때마다 행해졌다. 인간의 희생은 새 잉카왕의 즉위와 같은 특별한 기회를 제외하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커퍼쿠러아마(대제)에 관련해서 행해지는 중요행사가 와라치쿠이라 불리는 남자의 성년식이었다. 14세가 되는 잉카족의 아들들은 12월이 되면 쿠스코 근방의 와나카우리 언덕위에 있는 와카에 소집되어 모여 라마의 희생을 바치고 단식이나 그밖의 의식을 거행한 끝에 한 사람의 전사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잉카의 유래 ▶잉카는 15세기부터 16세기에 남아메리카 페푸이 쿠스코를 수도로 하여 안데스 세계에 군림하던 왕의 이름으로 원래는 특정한 왕의 고유 이름이었으나, 후에 왕의 총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 15세기 이후 잉카족의 정복, 확대의 개시에 수반하여 잉카 왕실의 사람들과 귀족들이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쿠스코 부족 전체가 잉카라고 일컬어졌다. 다만 잉카 제국이라는 명칭은 유럽인들이 붙인 것이고, 잉카족 자신은 그 영토를 타완틴수유(Tawantinsuyu)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것은 「4개의 지방」이라는 뜻으로서, 잉카 국가가 동서남북 4개의 행정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사실에서 연유한 말이다.

잉카의 문화

- 잉카의 정치와 경제 : 잉카문화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그 정치제도와 경제통제의 방법이다. 이론상 잉카 제국에서는 각 지방의 토지를 3분하여 잉카, 태양신, 일반 평민을 위해 경작이 행해졌는데, 잉카와 태양신을 위한 수확물은 창고에 보관되고 일부는 쿠스코로 보내졌다. 따라서 쿠스코는 전국에서 실려온 방대한 물자의 집적소가 되었으며, 잉카는 그것을 이용해 국민을 大토목공사나 군대를 위해 징발할 수가 있었다. 그 동원을 위해 인구는 십진법에 의해 10명,100명,1000명의 집단으로 묶여 1만명을 단위로 하는 우뉴에는 행정 책임자가 선임되었다. 전국은 4개 지방으로 나누어져 각각 황족 중에서 지사가 임명되었다. 또, 중요한 지점에는 행정관이 파견되는 한편, 토코일리코크라는 순찰사가 각지를 돌면서 매년 인구통계조사를 하기도 하고 재판을 하기도 했다. 세금으로 바쳐진 물자의 수송, 군대의 이동 등을 위해 전국에 도로망이 만들어지고, 도처에 여관, 창고 등이 세워져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했다. 또, 차스키라고 불리는 파발꾼이 수도와 각지를 연락했다. 군사나 제사를 위한 물자의 생산은 각지에 세워진 [처녀의 집]에서 젊은 여성들에 의해 이뤄졌다. 수도에는 태양신이나 잉카를 섬기는 여성들이 있었는데 아클라, 즉 선발된 자라 불렸다. 남성의 경우, 야나쿠나라 불리는 사용인이 각지의 공동체로부터 뽑혀 잉카의 귀족이 소유하고 있는 사유지의 경작이나 가축의 파수꾼 일을 보았다. 미티마에스라는 강제적인 인구이동동향이나 공용어(케추아어)의 사용이 강요되었는데, 잉카 사회의 기본단위는 아이유라고 하는 각지의 공동체이며, 또 잉카 이전의 지방세력이 편성한 정치조직이나 안데스의 고도차를 이용한 교묘한 생산체계도 거의 그대로 답습되었다

- 잉카의 미술 : 잉카문명은 1세기의 짧은 시간동안 성장하고 멸망했기 때문에 잉카 독자의 미술은 완숙할 여유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강력한 정치 권력으로, 인해전술에 의해 거석 건조물을 계속 만들어 쿠스코, 마추픽추, 사크사우아만, 오랸타이타보 등지에 지금도 유적이 남아 있다. 연마한 각석으로 접착제 없이 빈틈없이 석벽을 쌓아 올린 기술은 놀라운 것이나, 아치를 만드는 기술은 없었으며 궁전이나 신전도 건넨 대들보 위에 짚으로 지붕을 만들었다. 다른 문명과 교류를 갖지 않은 고립 문화였기 때문에 발달된 문화와 뒤떨어진 문화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이밖에 토기, 직물, 금세공 등은 전통이 있는 각지에서 만들게 하여 중앙으로 모았는데 에스파냐인에게 약탈되어 기하학 무늬의 채문 첨저호를 비롯한 토기등을 제외하면 당시의 실체를 알기는 어렵다.

잉카의 문화적 특징 ▶잉카인들은 석공기술과 토목사업을 활발히 벌였다. 그들은 발달한 석공기술을 가지고 많은 대 건조물을 건립했다. 또한 그들은 2층·3층의 건물이나 탑을 만들 줄은 알아도 아치는 만드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지붕은 모두 볏짚으로 덮어씌웠다. 새로이 도시가 건설되는 경우에는 일정한 계획이 준비되어, 태양신전과 광장을 중심으로 일반의 거주지가 정해졌다. 도로는 특히 발달하여 에콰도르에서 북부 칠레, 북부 아르헨티나까지 산지와 해안을 병행으로 달리는 2개의 간선과 많은 지선을 완성했다. 산지의 깊은 골짜기에는 현수교가 설치되었고, 일부에서는 통행세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간선요소에는 탄보라고 하는 숙박소 겸 물자저장 창고를 세워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발달된 도로망 때문에 하루 약 240 km의 속도로 전달이 이루어졌으므로 중앙정부의 명령전달과 정보수집은 능률적으로 행해졌다. 잉카제국이 넓은 지역에 걸쳐 있던 주권국가의 체재를 갖추게 된 것은, 이것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 밖의 토목사업으로는 관개로의 확대와 계단밭의 건설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후자는 해발고도 3,000 m 이상의 한랭한 고원에 들어앉은 키스와라는 난온한 협곡의 사면(斜面)에 옥수수를 심기 위하여 각지에서 만들어졌다. 또한 토기·직물제작·야금·금세공(金細工) 등의 기술은 대부분 잉카 이전의 시대에서 계승된 것이다. 그러나 제품의 스타일은 매우 독자적인 개성을 보인다. 금속기류는 에스파냐의 정복자에 의해 약탈되어, 소수의 청동기·은제품 외에는 볼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직물·석기·토기 등은 훌륭한 작품이 많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얼마 전에 63빌딩에서 잉카문명전을 열기도 했다. 그들의 유물은 아주 화려하고 금세공품이 많다. 오죽하면 자신의 황제를 풀어주는 대가로 방안에 황금을 가득 채워줬을까?

잉카의 홍수신화 ▶옛날에 파차차마라고 일컬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인류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워 살인을 일삼았으며, 인간들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기 자기네가 하고 싶은 짓은 무엇이든 했다. 그들은 전쟁과 약탈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신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세상에서 부패에 물들지 않은 곳이라고는 안데스 산맥밖에 없었다. 페루의 산악 지방에는 나무랄 데 없는 심성을 지닌 목동 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형제들이 키우는 라마들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밤에는 슬픈 표정으로 별만 바라 보고있는 것이었다. 그에 걱정이 된 형제는 라마 떼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자, 라마들은 곧 대홍수가 일어나 땅 위의 모든 생물을 없애게 될 것이라고 별이 말해 주었다고 대답했다. 형제와 그들의 가족은 가장 높은 산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홍수를 피하기로 했다. 그들이 라마 떼를 몰고 동굴로 들어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계속 내렸다. 그들은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라마들의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되었고, 온 세상이 파괴되고 있는 끔찍한 모습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산아래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인간들의 울부짖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비는 계속 내려 그들이 서있는 동굴 입구까지 차 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산은 점점 높아져 그 물이 그들에게 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 후 산은 물이 차 오를 때마다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들은 비가 멈추고 물이 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양신 인티가 다시 나타나 미소를 지으니 물이 사라져 버렸고, 때마침 식량이 다 떨어져 가던 형제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땅은 이미 말라있었다. 그리고 산은 원래의 높이로 되돌아갔고, 목동 형제와 그들의 가족은 다시 땅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들은 어느 곳에서나 살수 있다..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라마는 산악지대에서만 산다고 한다.

잉카의 흥망성쇠 ▶잉카의 흥망성쇠는 황제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잉카족을 케추아족이라고 부르는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며 전설을 종합해 보면, 13세기경 쿠스코 분지에 침입하여 선주민족을 정복하고 정착했으리라고 추정된다. 1532년 그들을 정복한 에스파냐인들이 기록한 잉카의 전승에 의하면, 초대 망코 카파크 이후 13명의 황제가 나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제 7대 까지는 전설상의 인물이고 제 8대 황제 비라코차 시대에 강적 창카족의 공격을 받고 그들을 격퇴하는데 성공한 그의 아들 티투 쿠시가 제 9대 황제 파차쿠티가 되어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고 주변의 민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제국 형성의 기초를 쌓았다. 결국 이 때부터가 번영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의 역사는 연대기적으로 구전에 의하여 전해진 자료가 있기 때문에, 구체적 사실이 알려져 있다. 발전의 계기가 된 것은 잉카족과 창카족의 싸움이다. 창카족은 쿠스코 남서쪽의 안다와이러스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페루 중부고원의 아야쿠초 지방까지 정치적으로 지배하였던 大부족이었으나, 쿠스코의 잉카족 정복을 기도하여 대군을 보내왔다. 그것을 당시 왕자였던 파차쿠티가 쳐부수었기 때문에, 쿠스코가 갑자기 중부 페루고원까지의 넓은 영역의 정치집단을 그 지배하에 넣을 수 있었다. (파차쿠티 자신이 정복한 것은 티티카카호 연안의 르파카족, 쿠스코 동방의 쿤티수유 지방등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그 아들 투파크 잉카 유팡키가 페루 북부를 침입, 치무 왕국을 정복했고, 또 파차쿠티 사망후에콰도르나 칠레, 아르헨티나의 북부도 정복했다.)

1200년경부터 지방적인 국가 형성기로 들어가, 각지에 왕국·수장국 등 정치조직이 성립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대하였던 것은 페루 북해안 지방의 찬찬(Chan Chan)이라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치무(Chimu) 왕국이었으나, 잉카제국은 그들 여러 왕국 중에서 가장 늦게 나타나 치무를 비롯하여 각지의 지방적 정치조직을 정복 통합하고 전 안데스 지대에 걸치는 통일국가를 형성했다. 영토의 확대와 더불어 파차쿠티는 태양신전을 개축시키고 그곳에서 일하는 처녀의 제도와 각종 의례를 정해, 정치적 통합을 위한 정신적 중심이 되기 위하여 쿠스코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동시에 정복지에 관리를 보내서 그 정치조직을 쿠스코의 산하에 놓는 일도 적극 추진했다. 이 大개혁이 단행된 것은 1430년대 말에서 40년대에 걸쳐서 였다. 그 후로도 파차쿠티의 정복사업은 계속됐다. 남쪽 티티카카 지방의 아이마라족이 정복되고, 또 페루 고원의 북부까지 잉카의 군대가 쳐들어갔다. 또한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지방의 평정도 실행됐다. 다음 대인 투파크 잉카가 성장하자 그의 지휘하에 페루 북해안 지방의 공략이 시작되었고, 치무왕국도 잉카의 군문에 항복했다. 군사정복의 확대에 따라 각지방의 도로가 정비되고 고원의 깊은 골짜기에도 다리가 놓여져 유명한 잉카 왕도의 도로망이 완성됐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파차쿠티는 74년경에 죽었다고 알려진다. 다음의 투파크 잉카 유팡퀴 황제의 시대에도 정복사업은 속행되어, 에콰도르 지방과 칠레·아르헨티나의 북부도 잉카의 영토가 됐다. 질서가 확립된 행정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됐으며, 각종 공공건축도, 태양신전과 성채를 중심으로 각지에 세워졌다. 잉카제국의 근본적인 형태는 이 투파크 잉카 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이 잉카가 죽은 것은 93년경이다. 그리고 잉카의 쇠퇴는 모두 알 고 있는 것처럼 에스파냐에 의해서이다. 간단히 줄이면,

32년에 내전이 발생했는데 아타왈파군이 쿠스코측을 완전히 제압한 직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거느린 에스파냐군이 침입하여 32년 11월16일 아타왈파가 고원의 도시 카하마르카에서 체포당하자 사실상 잉카 제국은 붕괴했다. 그후 망코라고 하는 잉카가 반란을 일으켜 그 자녀들이 71년까지 쿠스코 북서쪽 산중에서 굳게 버티며 에스파냐국에 치열한 항전을 계속했지만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잉카인들은 금이나 은은 다룰 줄 알았지만 철을 다루지 못했고 그들은 군사력은 정복자들에게 무참히 당할 만큼 약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너무 그들을 경계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황제가 잡혔기 때문에 그 찬란했던 문화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 잉카문명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치·사회의 기구편성에 나타낸 독특한 기술이다. 사회적으로는 신성한 절대군주 잉카를 받들고, 친족인 지배층과 일반평민으로 구성되는 계층사회를 형성하여 중앙집권적 전제정치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평민을 위한 사회보장이 완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잉카의 정체(政體)를 신권적 사회주의라든가 사회주의 제국(帝國)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

마야의 역사(Evolution of Maya culture) ▶마야는 B.C 3000년경 멕시코 남부 치아빠스주(chiapas)의 고원에 거주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B.C 1500년경 농경을 시작하게 됐다. B.C 8세기에는 멕시코 남부와 과테말라 중심의 중미 여러 지역에 거주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B.C 5세기에는 띠깔(tikal) , 와학뚠(Uaxactun)을 중심으로 번성하여 A.C 300년 경까지 문화가 발전했다. 이 때의 중심도시는 과테말라 북부 엘뻬뗀(EL PETEN)이었다. 마야는 크게 구 마야와 신 마야로 나눌 수 있는데 구 마야는 A.C 300~ 800년 을 말하며 과테말라에서는 띠깔과 와학뚠이 중심 도시였고 멕시코에서는 치첸이짜(chichen-Itza)와 빨렝께(Palenque)였으며 그들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다. 또한 달력과 문자, 천문학, 수학 등에 능했으며 A.C 5세기 이후에 가장 번성했고 9세기 중엽 갑작스런 침묵의 시기를 맞게 됐다. 이 무렵에는 사람들이 대도시를 떠났으며 궁궐, 신전, 피라밋과 같은 위대한 축조물이 정글에 파묻히게 됐다. 이러한 마야인들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이 많은 가설을 내놓았는데 그것의 내용은 이러하다.

1. 고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했을 것이다.

2. 갑작스러운 전염병이 창궐했을 것이다.

3. 지배계급인 제사장들에 대한 반기였을 것이다.

4. 외적이 침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설일 뿐 아직까지 정식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그후 구 마야 시대를 지나 신 마야 시대로 접어드는데 신 마야시대는 A.C 800~ 1500년을 말한다. 이때의 중심도시는 유까딴 반도(Yucatan)였고 그들은 멕시코 북부 지역의 똘떼카 문화권과 국경지역에서 활발한 교류를 펼쳤다. 그후 똘떼카족은 서서히 유카딴으로 진출하여 마야의 주요부족이 됐다. 9세기 후엽 이짜족(Itza)은 치첸이짜(chichen-itza)에 자리를 잡고 피라밋을 건설했다. 그들의 신앙은 꾸꿀깐(Cuculcan)이었다. 이들과 똘떼카족의 활발한 교류는 똘떼카문화권에서 께짤꼬아틀이라고 부르는 깃털뱀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후 9세기 후엽부터 12세기 후엽은 평화로운 시기였다. 치첸이짜(chichen-itza)와 우슈말(Uxmal), 마야빤(Mayapan) 이 세도시의 동맹 때문이었는데, 12세기 말 마야빤의 유까딴북부 정복으로 동맹은 깨어지고 마야빤이 12개도시를 중심으로 제국을 건설하고 15세기 중엽까지 통치를 했다. 하지만 1450년경 신 마야제국은 제국의 구성원 마야족, 이짜족간의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기에 이르렀고 1536년 스페인에게 정복당했으며 끼체족이 과테말라고원에서 맹위를 떨치기는 했으나 이도 내란으로 붕괴되었고 곧 정복당했다.

마야문화의 특징 ▶마야인들은 교역을 하기도 했으며 통화의 개념도 있었다. 또한 근대적인 개념은 아니지만 장도 섰던 것으로 알려진다. 유카탄반도의 소금·벌꿀·목면 제품과 중앙·남부지방의 산물인 플린트제품, 카카오, 케찰섬의 깃털 등의 교역이 성행하였는데, 카카오 열매는 일종의 통화와 같은 구실을 했다. 이 교역은 유카탄에서 타바스코지방에 이르는 해상로를 통해서 했는데, 내륙지방에도 장이 섰으며, 또한 멕시코에서 오는 포추테카와의 접촉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야인들은 초가에서 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취락에는 규율성이나 통일성이 없이 지형적 제한에 따라 마음대로 건물을 지어놓은 데 지나지 않아, 멕시코 중앙고원이나 잉카의 고대 계획도시와는 전연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러한 취락으로 구성된 마야의 사회가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 많은 주장이 있으나, 혈통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엄격하게 제한되는 종류의 계급사회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신관(神官)·군인·정치지도자·상인 등은 알메헨이라 불리는 귀족계층에 속하여 일반농민과는 구별됐다. 또한 일반평민 밑에는 주로 전쟁포로들로 구성된 노예계층이 있었고, 이 밖에 잉카의 야나코나와 비슷한 수장 및 귀족의 농노가 있었다. 정치권력은 에스파냐 사람들이 침입할 무렵 멕시코계의 군인 지배 계급에 의해 독점됐다.

또한 마야는 어떤 문명보다 발달한 역법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은 귀족계층이 독점했을 뿐 일반평민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역법·신성문자들은 잉카의 경우와 비교하면 체계적·복합적이고 표기수단도 발달되 있다. 또한 마야인은 일종의 윤회사관을 믿고 있었고, 세계를 4방향으로 나누어 각 방향마다 색으로 표시하여 구분했으며, 천공에 13층, 지하에 9층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 천체의 운행을 여기에 들어맞게 했다. 또한 천체의 위치를 길고 짧은 2개의 역으로 표시하고 이를 신성문자로 표기했으며, 신들의 속성에는 각각 상반된 이원성을 부여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멕시코의 톨테크 및 아스테크계 문화와 유사성이 있어 주목된다. 마야의 역은 260일의 단력과 365일의 장력에 의해 동시에 표현되어 이를 짝맞추는 것이 결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운명은 이를 짝맞추어 나타나는 4개의 부호에 따라 정해진다고 생각했고, 모든 의례는 이 역에 따라 시행됐다. 그리고 이에 수반해서 천체의 관측이 엄밀히 행하여져 태양의 방위, 달 및 별의 운행이 관찰됐으며, 금성·화성의 주기를 정확하게 산출하고 있었다. 의례는 한 해 동안 다양한 형태로 행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톨테크계의 문화가 침투할 무렵에는 인신희생의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역이나 다른 것을 표기하기 위하여 숫자와 신성문자가 발달했다. 숫자 이외의 신성문자에 관해서는 극히 일부만 해독됐다.

가로안의 내용은 어느 지역으로 전파되었는지 나온 것인데, 그다지 중요하진 않다.

(가로안의 내용은 참고하세요. 그다지 중요하진 않습니다. ▒이 마야문화의 영향은 이곳으로부터 서 우수마신타강 유역의 피메드라스 네그라스·야슈칠란·알탈드사크리피시오스·팔렝케 등으로 미치고 동시에 동 페리세지방의 벤케 비에호 및 푸시르하와 온두라스의 코판에도 자극을 주었다.

또한 고전 전기에는 멕시코고원의 테오티우아칸문화의 영향이 과테말라 고지에 미쳐 카미날퓨의 밀라프로레스기 문화가 창조되었는데, 티칼 및 유카탄지방에도 같은 영향을 받은 듯한 흔적이 약간 남아 있다.▒)

마야어 풀이

-Ahau 마야 어로 신 또는 고귀한 왕

-Ah kin 고귀한 성직자

-Atl-atl 던지는 창(槍)

-Balche 강한 포도주

-Cenote 물 웅덩이. 세노테의 물은 석회암을 거쳐 여과되어 마야 식수의 원천이 되었다.

-Chicle 사포딜라라는 나무의 즙. 껌을 만드는데 쓰임

-Chilan 예언자 또는 매개물

-Chultun (pl. Chultunob) 병 모양을 한 물 탱크로 마야 지하에 건설되었다.

-Haab 세 개의 마야력 중 하나로 우리가 쓰는 것과 가장 비슷하다. haab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Vague year라고 알려짐

-Halach Uinic 지도자, 왕

-Huipel 마야 전통의 두르는 면옷.

-Kawil 생계의 신 이름. 그 신에게는 피, 정액, 수액, 옥수열매, 가루반죽 또는 고무같은 가치있는 물질이 봉납되었을 것이다.

-Ladino 마야와 스페인의 혼혈인

-Manta 정사각형의 옷으로 망토나 담요로 쓰였고 오늘날도 여전히 입고 있다.

Maya 마야는 B.C 2600년에 시작되었고 오늘날의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서 A.D 250년경에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천문학이 고도로 발전했으며 달력이나 상형문자 건축술, 석공술에서는 뛰어났으나 철을 사용할 줄 몰랐다. 마야 문명은 A.D 900년경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Milpa 옥수수밭

-Nacom 마야군인 지휘자

-Peten 과테말라 북부지역.

-Pok-a-tok 마야의 공놀이

-Pom 코팔나무의 진액, 마야에서는 고무로 사용되거나 츄잉껌이나 향으로 사용되었다

-Sacbe 하얀길

-Uayeb 마야의 haab력에서 365일중 운이없는 5일.

-Xibalba 마야하층민이 죽었을 때 가는 곳.

Yucatan 첫 번째 마야의 본거지. 여기에서 그들은 과테말라 벨리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그리고 다른 멕시코지방으로 퍼져나갔다. 마야인들은 유카탄을 칠면조와 사슴의 땅으로 부른다. 왜냐하면 그곳은 먹을 수 있는 야생동물이 많기 때문이다.

마야의 흥망성쇠 ▶마야는 A.D 300년경에 이르러 고전기라 불리는 융성한 시대를 맞이한다. 마야문화의 고전기는 900년경까지 계속되는데, 600년을 경계로 그 이전을 전기, 이후를 후기로 나눈다. 고전기 문화의 중심지는 페텐지방의 북동지역으로, 티칼·와샤크툰·나쿰·나랑호 등의 거대한 신전도시가 이 시대에 잇달아 세워졌다. 아치와 비슷한 호 모양의 구조물을 떠받든 거대한 건조물, 역법, 신성문자, 특징적인 토기 및 석조각물 등은 모두 이 시대에 나타났고, 이 마야 문화의 영향은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영향을 주었다.

고전 후기의 300년 사이에 마야문화는 더욱 번성하여 페텐 및 우수마신타 지역의 신전도시는 장대화하는 한편, 북부의 유카탄지방에도 리오 베크·체네스 푸크 등의 건축양식이 생기고, 욱스말과 그 밖의 지역에는 거대한 피라미드와 신전 등이 건조됐다. 석조각·토기 등도 많이 만들어졌으나, 이와 함께 보남파크 신전에서 볼 수 있는 큰 벽화와 티칼·코판·키리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조각과 신성문자를 새긴 대석주 등도 만들어졌다. 이들 석주에는 마야의 역년이 새겨져 있는데, 900년 이후에 새로 세운 석비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서 900년 이전에 고전 마야는 종식된 것으로 보인다. 고전 마야가 쇠퇴한 원인은 잘 알려지지 않고 내란설, 토양의 황폐설 등이 학자들에 의해 주장됐으며, 최근에는 타바스코지방에서 침입한 멕시코계 주민에게 정복되었다는 설도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 페텐 지방의 고전 마야문화가 쇠퇴한 후 유카탄 반도에서는 푸크 양식의 마야문화가 얼마 동안 계속됐으나 10세기가 끝날 무렵 멕시코에서 톨테크계(系)의 군사적 집단이 침입하여 마야족을 정복하고, 치첸이차를 중심으로 유카탄반도를 지배했다. 이어 13세기에 들어서는 타바스코지방에서 이차족이 침입하여 마야판시(市)를 건설하고 코콤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코콤왕조는 15세기 중반에 제국의 구성원 마야족, 이짜족간의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기에 이르러 내란 때문에 무너지고 유카탄반도는 십여 개의 작은 수장국으로 분열된 채 16세기에 에스파냐에 의해 정복됐다. 그리고 과테말라 고지에도 11세기경 톨테크계 주민이 침입하여 키체족의 우타트란, 카크치켈족의 이심체 등 멕시코 양식의 신전도시가 이 시대에 건설됐다.

따라서 정리를 하자면 마야는 고대 멕시코 및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번성한 인디오 문명 및 이를 이룩한 민족의 명칭이겠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말 할 수는 없겠다. 마야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도 우리를 자극하고 있으니..거두절미하고 흥망성쇠에 대해 얘기하면,

AD 300년부터 고전기라 불리는 융성한 시대를 맞이하며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던 마야는 900년 이전에 종식되고 학자들의 추측만 무성할 뿐 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전 마야문화가 쇠퇴한 후 한 때 발전을 하기도 했지만 10세기 무렵을 기점으로 서서히 쇠퇴하여 15세기 중반의 내란을 거쳐 16세기에 에스파냐에 의해 정복됐다. (마야의 역사에서 스페인??에스파냐의 영어이름)

문명의 차이점, 공통점 ▶우선 두 문명은 시대적 지역적 배경부터 다르다. 마야가 멕시코 남부일대이며, 잉카는 페루일대 안데스산맥 일대이다. 취락을 비교해서도, 마야는 규율성이나 통일성이 없이 지형적 제한에 따라 마음대로 건물을 지어놓은 데 지나지 않았지만, 잉카는 고대 계획도시였다. 마야는 어떤 문명보다 역법, 신성문자들이 발달했었다. 잉카와 비교하면 더욱 체계적, 복합적이고 표기 수단도 발달되어 있었다. 마야의 문자는 글자가 완전해지기 이전 문명이 멸망한 탓으로 해독이 어렵다. 잉카는 석공기술과 토목사업이 발달했는데 도로가 특히 발달하여 많은 도로를 만들어 통행세를 받기도 했으며, 넓은 지역에 걸쳐 있던 주권 국가의 체재를 갖추게 된 것은, 이것에 힘입은 바가 컸다.

마야와 잉카의 비슷한 점으로는 계급 사회를 들 수 있다. 마야는 귀족계층, 일반평민, 노예계층이 있었고, 이 밖에 잉카의 야나코나와 비슷한 수장 및 귀족의 농노가 있었다. 두 문명은 모두 종교가 사회 전반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태양신을 섬겼고 두려워했다. 잉카에서는 태양신은 잉카황실의 조상이며, 황제는 현인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태양신을 위해 산사람을 재물로 바치곤 했는데, 여기서도 차이가 있다. 마야는 남자의 가슴을, 잉카는 여자의 가슴을 각각 칼을 꽂아 태양에게 보이곤 했다.

벽의 조각물을 보면, 조각물 등에 자주 등장하는 (우주복을 입은 것과 같은) 마야의 신들은 항상 큰 헬멧을 쓰고 입과 코 주위에는 산소호흡기 (혹은 소형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잉카의 신들은 키가 30 ~ 60cm 밖에 안 되는 소인들이었고 벼락막대기를 손에 지니며 날씨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과 동물들의 피를 좋아했고, (자신들을 위하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동물의 피, 심장 등을 제물로 바치게 강요를 했다고 한다.

잉카문명

13~16세기 중엽에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지방에 번영하였던 잉카 제국의 문명이다. 안데스 지방에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고도의 농경문화가 발달했는데 13세기 초에 쿠스코 계곡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잉카족이 그 전통을 이어받아 독자적인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침공을 받아 1533년에 멸망하였다.
잉카 제국은 농업을 바탕으로 하여 옥수수, 감자, 땅콩 등 여러가지 작물을 재배하였다. 그리고 정치 조직과 사회 제도가 매우 발달했으며 건축, 토목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였다. 곳곳에 남아있는 신전, 요새, 관개 수로 등은 당시의 건축 기술이 우수했음을 말해준다.


마야문명

멕시보의 유카탄 반도 및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마야족을 비롯한 인디오들이 이룩한 문명이다.
마야문명은 기원을 전후하여 농경을 바탕으로 발달하였으며 독특한 태양력을 비롯하여 천문, 건축, 미술,문자 등이 발달하였다.
유적으로는 피라미드 사원, 유물로는 도기 및 목조 등이 남아있다.

아즈텍 문명

15세기 말부터 아스테크는 군사와 정치력을 증강하여 수도로 삼을, 섬 북쪽의 상업도시 토라테로르코를 1473년에 합병하고 이어서 1500년까지 텍스코코와 트라코판을 완전히 제압, 멕시코의 주권자가 되었다.
아스테크는 자신들이 지진(地震)을 나타내는 제5의 태양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 그 태양이 사멸하고 우주가 멸망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적인 인신공희를 행했다. 즉 세계의 본질인 허무의 암흑과 싸우는 태양에게 인간의 피와 심장을 바쳐, 여기에 활력을 주어 영원히 아스테크 시대를 지속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스테크는 인신공희를 행하기 위한 여러 개의 대신전을 수도에 세웠고,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달력에 의해 제일을 정하여 각종 의식을 행하였으며, 또한 산 제물을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강대한 군사조직을 만들어 끊임없이 정복을 행하고 포로를 모아들였다.
사회조직면에서 아스테크는 카르프리라는 공동체 조직을 단위로 하는 계급사회를 형성하였다.
후에 결굴 아스테크문명은 1520년 갑자기 나타난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코르테스가 거느린 수백 명의 군대의 침입으로 수개월에 걸친 외교교섭과 격렬한 전투 끝에 멸망하였다.

지식인질문 : 잉카문명,마야문명,아스텍문명에 대하여 , Viracocha

잉카문명 아스텍문명 마야문명에 대하여....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해주세요.

빨리 부탁드려요

 

 

 

이상한글은 신고 합니다.

서울 강남 인천 경기 대전 광주 울산 부산 대구 최신정보웹진 copyright 2007